공부의 이유 - '우리는 왜 공부하는가?'

 



공부의 이유

'우리는 왜 공부하는가?'




카페에서 독서를 하던 참에 옆 테이블의 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려왔다.

들을려고 들은것은 아니지만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속의 고막을 두드려대었다.

아마도 과외학생과 과외선생 사이인 것으로 보이는 것이 여학생은 고등학교 문제집을 풀고 있었고 남자는 그런 학생을 지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대입구역 카페에서 있었으니 낮지 않은 확률로 남자는 서울대학교 학생일듯 싶다.


여기까지는 모든게 완벽했지만 카페에 앉아 독서를 하는 내내 나의 신경을 건드렸던 것은 남자의 교육스타일이었다.

학생의 행동이나 문제풀이가 하나한 이해 안간다는 듯이 계속해서 짜증섞인 꾸중을 주고 있었다.

다행이 학생은 그런 과외선생의 꾸중이 익숙한듯했다.

선생님의 꾸중에도 방긋하며 "왜 이렇게 문제를 풀고 있는지 저도 모르겠어용 ㅎㅎ" 이런식으로 웃어보였다. 


선생은 학생의 문제풀이법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학생의 문제 하나하나 지적하는데 바빠보였다.

그 지점에서 독서를 하던 나에게 깊은 상념의 시간이 찾아왔다.

저들은 무엇을 위해 이 귀중한 시간에 카페에 앉아 비싼 커피를 마시며 공부를 하고 있으며 또한 그 학습을 지도하고 있는가?

이러한 생각은 그들에 대한 관찰에서 확장되어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가'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우리는 도대체 왜 공부를 하는가?'

여기서 공부에 대한 어원을 살펴보면(잠시 나무위키의 힘을 빌려)

불교 종파의 하나인 선종을 통해서 퍼진 용어라고 한다. 공부의 한자어 조합은 백화문으로 기록된 당나라 선승들의 어록에서 처음으로 확인되는데, 당시에는 做工夫(주공부)와 같은 형태의 숙어로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불법을 열심히 닦는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송나라 시대의 대학자인 주자가 자신의 책 <근사록(近思錄)>에서 송학(宋學)의 선구자였던 정명도와 정이천의 사상을 표현하는 말로 '공부'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면서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점차 工夫로 표기가 고정되어 갔고 일상 용법으로도 현재 우리가 아는 개념으로 굳어지게 된다.

뭐... 그렇다고 한다. 이쯤에서 나무위키 탭을 끄자.


카페에서 잠시 책을 내려놓고 삶에 있어서 공부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사색해보았다.

잠깐의 사색으로 내놓은 나만의 공부에 대한 정의를 적어보고자 한다.

결론을 먼저 말해보자면 아래와 같다.


소비 : 세상을 소비하는데에 있어 더욱 높은 해상도를 제공해준다.

생산 : 세상에 가치를 창출하는데 있어 시작점과 생산속도를 높여준다.


먼저 소비의 관점에서 공부를 살펴보면 말 그대로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뜻이다.

여행을 가서도 단순히 멋잇는 북유럽의 산자락을 볼수도 있지만 지질학적 특성, 화산의 형태, 지구의 역사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북유럽의 아름다움이 다르게 느껴진다.

와인을 마실때도 단순히 술을 마시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와인에 대한 풍미있는 지식으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은 와인에 대한 해상도가 높다.

이러한 관점에서 공부를 한 것은 세상을 아름답고 깊게 볼 수 있는 지혜의 해상도를 1028PX에서 4K 60fps로 확장시켜준다.

즉, 소비의 관점에서 공부는 삶을 아름답고 풍미넘치게 해준다.


두번째, 생산의 관점에서 본 공부는 세상에 가치를 창출하는데 있어 시작점과 생산속도를 높여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노동, 투자, 사업 이 3가지의 루트속에서 평생을 생산하며 살아간다.

직장인은 노동자로 살고, 투자자는 부동산과 주식 등의 자본을 투자함으로 살수도 있고, 그림, 음악, 춤, 영화, 스터디 카페, IT비즈니스 등의 다양한 사업으로도 살수 있다.

또는 이 모든 세 가지의 갈래길을 함께 걸으며 살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생산을 하며 가치를 창출하고 교환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공부는 어떠한 생산영역이든지 그 시작점을 높여준다.

그리고 한번 그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 지속적으로 공부를 하면 상승의 속도도 높여준다.

전통적으로 대한민국의 어머니, 아버지들은 자식들이 공부를 통해 훌륭한 회사에 입사(ex 대기업)하는 것을 자식농사의 미덕으로 삼으셨다.

지금 시점의 내가 바라본 그분들의 이런 미덕은 위 세가지 생산 영역에서 첫번째 키워드인 노동에 집중되어 있어보인다.

결국, 어느 세대나 생산관점에서 공부의 이유는 시작점의 높이(ex 좋은 대학, 좋은 기업, 좋은 인맥 등)와 가속도를 올리기 위함이다.

즉, 생산의 관점에서 공부는 삶을 풍요롭게 하고 지름길을 제공해준다.


어쩌면 소비의 관점에서의 공부는 내면의 확장을 생산의 관점에서의 공부는 외부의 확장을 일컬을 수도 있다.

그또한 합당한 정의같아 보인다.


이러한 사색을 끝내고 다시 옆 테이블의 그들을 지켜보았다.

남자는 아직도 학생을 다그치며 문제풀이법의 틀림을 지적하는 중이었다.

정말 아쉽고 아쉬웠다.

학생은 다양한 문제풀이에 대한 고찰의 기회를 남자로 인해 놓치게 되어 생산력, 정확히는 창의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획일적인 문제풀이를 고집하여 다양한 풀이법에 대한 소비법과 높은 해상도를 가질 기회를 잃은 사람이었다.

감히 나만의 오만인 것인지 아니면 혹은 어쩌면 지금의 한국에서는 저게 정답인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점은 이러한 교육방식과 어쩔 수 없이 서로를 한가지에 집중하게 하는 채찍질은 우리사회를 풍요롭게도 아름답게도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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